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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志

부여족(夫餘族=夫余人) ----徐氏=餘氏

已有 98 次阅读2012-10-11 08:27 |系统分类:个人心情|

1.부여(夫餘)의 족칭(族稱)과 족원(族源)
부여족(夫餘族)은 부여국(夫餘國)을 세웠는데, 우리나라 동북지구(東北地區)에서 가장 빨리 문명시대로 들어간 고민족의 하나이다. 동북민족사(東北民族史)뿐아니라 중화민족(中華民族) 문명사(民族史)에도 비교적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이덕한 1991) 이처럼 중용한 고민족(古族史)인바, 그들의 족칭(族稱)과 족원(族源) 문제는 줄곡 외국 연구자가 중시하였다.
 
부여(夫餘)란 이름이 먼저 보이는 곳은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의 한 글귀인데, 연(燕)을 설명하면서 북린조환,부여(夫餘)라고 나타난다. 사기전으로는 (일주서(逸周書).왕화편)중의 (이이조헌상서)에 와청정동,(부루(扶婁),구주,이노,구심,구이(九夷),십만,월구,전발문신,청령이어피지혁란 기재가 있다. 이 때문에 부루(扶婁)를 부여(夫餘)로 여기는 설이 있다. 이런 류의 설법은 유력한 증거가 결여되어 이 설을 따르는 학자는 많지 않다.
 
(미아.석지) 의 구이(九夷)에 대한, 당(唐)나라때 이순의 주(周),송(宋)나라때 사호의 소는 일관되게 구이(九夷)의 제5종이를 오수라고 칭하였다. (자애보)에서 말하길 오수,동방명문,즉 부여(夫餘) 야 라고 했다.
부여(夫餘)는 오수라고도 전사되었음을 알수 있다.
 
양장거의 (삼국지방증.동이전)에 또한 夫餘를 扶餘라고 쓰고 있다. 무릇 夫餘,오수,扶餘 등은 모두 동음(同音)전사이다.
부여족(夫餘族)은 두 민족의 족명(族名)을 합쳐 칭한것으로 그뜻은  그뜻은 번여(番餘)이라고 생각된다.(이덕산)
부여(夫餘)란 단어가 내포한 뜻을 이해하니 그 족원도 역시 이해된다.번(番)과 서(徐)는 둘다 동이(東夷)이고 ,그러한 부여(夫餘)는 당연히 동이(東夷)에 속한다.
번족(番族)은 본디 노서남(鲁西南) 지역에 살았는데 여족(餘族)도 마찬가지다. 서욱생(徐旭生)은 서국(徐國)은 주초에 지금의 산동(山東) 곡비현(曲阜縣)부근에 있어야만 한다. 이후 남방(南方) 수백리 밖으로 옮겨갔다. 라고 말하였다.(1985). 고길강은 고증하여 말하기를: 서족(徐族)의 예 터전은 지금의 노서남(鲁西南)지구. 란산(蘭山).협성 일대 이다라고 하였다(1990).
두 민족(民族) 모두 동이(東夷)이고 거주지 또한 서로 이웃하였던 바, 이러한 선결조건이 있었기에 그들은 동북지구(東北地區)로 옮겨간후 하나의 민족(民族)으로 쉽게 합쳐졌다.
 
2.부여족(夫餘族)의 발흥
부여족(夫餘族)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지금의 동북지구(東北地區)로 들어간 뒤, 새로운 민족(民族)을 형성하고, 곧 민족정권(民族政權)을 세웠다.
부여(夫餘)의 전신인 번(番)과 서(徐) 두민족(民族)은 일부가 동북(東北)으로 들어간 시기는 대략 상말주초(商末周初)이다. 주(周)가 상(商)을 멸하자,번(番)과 서(徐)  두 민족(民族)은 은상의 겨례붙이 민족이었기에 일찍이 연합하여 주周에 반란을  일으켰었다. 이에 관한 그들의 활동 및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앞서 박족편(駮族)에서 번족(番族)의 일부인 반고(盤古)를 다루면서 이미 논술한바 있다.
 
서족(徐族)의 주(周)에 대한 제1차 반란은 반고(盤古),회이(淮夷),동족(侗族) ,담족,주족 등과 연합한것이었다. 실패하여 진압당한뒤, 서족(徐族)은 이민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주(周)에 대한 제2차 반란은 주 목왕(周穆王)때 일어났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東夷傳)에 후 (서이徐夷),내솔(구이九夷),이벌종㈜,서지하상, (목왕穆王)외기방식,내분동방제후,명(서徐)(언왕偃王)왕지(王之) 라고 적혀있다.
제2차 반란때는 일변하여 리더가 되었으면 직접 주왕조(周王朝)의 통치를 위협하였다. 드리하여 목왕(穆王)을 몰아부쳐 서이(徐夷)에 대해 혜택을 베풀고 달래는 조치를 취하게끔 만들었다. 반발 활동은 그치게 되었다.
 
대략 이시기에 번(番)과 서(徐) 두민족(民族)은 나라를 도로 세우기를 바라지 않았으며,또한 거듭되는 주왕조(周王朝)의 진압을 받아 마침내 각각의 일부민족(民族)이 동북지구(東北地區)로 옮겨갔다. 그동안 각자 따로따로 무리지어 살았으나, 결국에는 새로운 민족(民族) 즉 부여(夫餘)를 형성하였다.
 
이 새민족(民族)이 형성된 시기를 (손진기) BC 119- BC 108년으로, 한(漢)이 흉노의 동쪽땅을 깨부수고 한(漢)이 예맥(濊貊) 및 고조선(古朝鮮)땅에 4군을 설치하기전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시기는 (오문형)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에서 보듯이 지나치게 늦다. 부여(夫餘)의 건국 시기를 뚜렷하게 밝힌 역사 기록은 없다. 그러나 동(東).서한(西漢)시대의 부여정권(夫餘政權)이 이미 상당히 강대하게 나타나는점과 또한 일찍이 경제 및 문화의 수준도 몹시 높았던 점을 비추어보아 당시 동북 여러 민족중에서 선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언하건대 그 건국시기는 마땅히 진.한시기보다 빨라야하며, 전국시대일 가능성이 있다. 이 한 도막의 논고는, 비록 부여의 건국시기를 설명하고는 있지만,민족 형성시기는 반드시 건국 존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의 형성 시기의 확정에 때한 참고로써 가치가 있을 뿐이다. 전국시대에 건국되었다면 민족형성은 전국시대 전이어야한다.
 
현재 길림 대안의 한서2기 문화와 백금보문화의 조원 망해둔 유형을 부여의 조기 문화유적으로 여기는 것이 비교적 일치된 견해이다. (이전복 1985;동주신 1991) 한서2기 문화와 백금보 문화 망해둔 유형의 시기는 전국 서한시기에 상당한다. 이로써 부여의 민족 형성시기가 전국시대 전이었음을 증명하는데 한걸음 나아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국시대전 춘추시대(春秋時代)인다.
 
부여(扶餘)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족명(族名)을 성(姓)으로 삼았다. 나라가 기울어 질 무렵, 어떤 부여사람들은 (중국)북방 정치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전전과 동진간의) 비수의 싸움 후에 모용수가 병사를 일으켜 (수)이 (낙양)사면수적,곡취(업)이노지,내인병이동,고부여왕(여울餘蔚)위영양태수,급(창여),(선비),(위구) 각수기중항(수) 하였으며,(모용)수은 연왕을 일컫고 나서,(여울 餘蔚) 위정동장군,총부좌시마,봉부여왕 하였다. (자치통감.진기) 같은 시기,모용농이 사람을 모아 병사를 일으킬때 호응한 자중에 동이(여화 餘和)가 있었다. (위의 책) 태원 10년(385) 연의 건절장군인 여암(餘巖)가 반란을 일으켜 소성을 공략하고 척천여호이거,수거(영지) 하였다. (위의 책) 이 여암(餘巖)은 서암(徐巖)이라고도 하는데 (진서.모용수재기 등), 여화, 여암 모두 부여의 유족이다. (진연경1994) 이밖에 (씨족략) 인 (전연록)에 여원(餘元)이 있고,(성씨급취편) 인 (성원)에 진에 여화가 있다고 적혀 있으며,(십육국춘추.후연록)에 광록대부 여숭(餘崇)과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적혀있다. 또, (십육국춘추.남연록)에 수광 여치, 상평원공주가 적혀있다. 무릇 여원,여화,여숭,여초,여치 등은 모두 부여 사람이다. 이는 여 (餘)씨가 당시에 이미 중국 북방의 저명한 성의 하나가 되었음을 드러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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